[#28 기획기사] 세월호 기록문을 읽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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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기록문을 읽어내며 -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
· 늦은 출항
2014년 4월 15일 늦은 오후, 인천 앞바다는 짙은 안개 속에 싸여있었다. 그날 하루 출항한 배는 하나도 없었다. 세월호 역시 오후 6시 30분 출항을 앞두고 발이 묶여있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은 수학여행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에 김빠진 표정으로 여행 가방에 주저앉아 있었다. 청해진해운은 안개가 걷히기를 밤 11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때보다 많은 화물을 실었고, 평소보다 수익을 더 올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밤 8시 30분 무렵,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자 인천 해경은 시정주의보를 해제했다. 세월호는 밤 9시 무렵 출항했다. 훗날 피의자 조사에서 당직 조타수 조준기는 안개 때문에 앞이 거의 안 보여 레이더에 의존해 항구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2등 항해사 김영호는 ‘내려가지 않았으면’하고 바랐다고 진술했다.
○ 세월호는 왜 침몰했는가.
1. 무리한 증·개축으로 배의 복원성 상실
청해진해운은 2003년부터 인천-제주 항로를 월‧수‧금에 단독 운항했다. 매년 흑자를 내자, 화‧목‧토에 여객선을 투입하겠다는 경쟁자가 나타났다. 위기감을 느낀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경에 일본으로 건너가 18년 사용한 세월호를 사들였다. 곧바로 실소유주 유병언 개인 사진 전시실을 만들고 여객실과 화물 적재 공간을 늘리기 위해 증·개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십억 원을 들여 배를 증축했는데도 운항 시 적재 화물은 절반 이하로 줄여야 했고, 평형수만 4.6배 늘려야만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나쁜 결과였다. 무엇보다 복원성(배가 기울어졌다가 원래의 평형상태로 돌아오는 성질) 이 나빠져 평형수(선박의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배 안에 채워 넣는 물) 를 1694.8톤이나 실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배’로 바뀌어 있었다.
화물운송 수입이 회사매출에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청해진해운으로서는 사실상 지킬 수 없는 비현실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국선급은 단순히 수치만 맞추어 세월호에 대한 ‘복원성계산서’를 승인했다. 심지어 한국선급이 승인한 선박 가운데 평형수를 채우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운항할 수 없는 배는 세월호가 유일했다.
2. 무시된 경고 신호들
2014년 1월 20일, 세월호는 제주항에서 출항에 실패했다. 예인선의 도움을 받았지만, 부두에서 30미터 정도 이동하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화물차 기사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다른 선박들은 어려움 없이 출항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류 과장 박기훈은 “화물차 기사들이 강력하게 화물 손해배상을 요구해 위험을 감수한 출항”을 했다고 적었다. 그 후 청해진해운은 자체 회의에서 들여온 지 1년도 안 된 세월호의 매각을 신속하게 추진하기로 했다.
2014년 3월 10일에는 제주항에서 화물을 실은 지게차들이 한쪽으로 집중돼 화물을 적재하다가 배가 기울어진 일이 있었다. 지게차가 있는 쪽으로 배가 기울어졌고, 이 때문에 승객용 계단이 육상에 닿아 찌그러졌다.
3. 화물은 더 싣고 평형수는 빼내고
2013년 3월 15일 취항한 세월호는 막상 운항을 시작해 보니 경제성이 없었다. 제주항에 자력으로 이‧접안(배를 안벽이나 육지에 댐)하기가 어려워 예인선 비용이 많이 들었고, 속력이 나오지 않아서 기름값이 많이 들었다. 인천-제주 항로를 한 차례 왕복할 때마다 보통 4,000만 원이 넘는 손해가 났다. 청해진해운은 2013년에만 40억 원을 웃도는 적자를 냈다.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최대한 화물을 많이 실어야만 했다.
배가 매번 운항할 때마다 운항관리자는 화물량을 확인하고 화물에 고박(화물을 고정하거나 묶는 것) 상태를 검사하고 복원성을 계산해서 출항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배 바깥에서 눈으로만 대충 만재흘수선(여객이나 화물을 승선 또는 적재하고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최대한도를 나타내는 선으로 선박의 양측에 특정한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을 확인하다 보니, 청해진해운이 화물을 더 많이 싣고 평형수를 빼내는 방식으로 운항하는 것을 잡아낼 수 없었다.
4. 고박(화물을 고정하거나 묶는 것) 불량
세월호에서 수거한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을 복구하여 배의 경사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 2층 선수 간판에 있는 컨테이너가 한쪽으로 쏠려 무너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울기가 약 20도에 도달했을 때 화물이 처음 좌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월호는 급선회 후 1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45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어졌다. 세월호의 부실한 화물 고박은 결국 배가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기울어지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5. 수밀문과 맨홀을 항상 열어놓은 기관부 선원들
2017년 3월 세월호 인양 후, 조사관들은 세월호에 지하층 기관 장비 구획의 모든 맨홀과 수밀문이 모두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수밀문과 맨홀들은 운항 중에 반드시 닫아놓아야 한다. 세월호는 7개의 기관부 수밀문과 수밀 맨홀을 항상 열어둔 채로 운항했다. 배의 안전보다는 선원들의 통행 편의가 중요했다.
기관부 선원들은 기울어진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상황에서 모든 문을 열어둔 채 기관실을 탈출했다. 열린 채 방치된 세월호는 더욱 빠르게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304명의 생사를 가른 결정적 순간 중 하나였다.
○ 왜 구하지 못하였나?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세월호는 갑자기 우회전하는 동시에 바깥쪽인 좌현으로 기울어졌다. 화물칸에 실려있던 컨테이너, 차량, 일반 화물들이 왼쪽으로 쏠렸고 그 힘으로 배는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 세월호에 열린 수밀문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101분 만에 빠르게 침몰했다.
1. 승객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주한 선원들
조리장 최찬열은 3층 승객 식당에 있다가 갑자기 배가 기울어지자, 조리부 선원들을 향해 “빠져나가라”라고 소리쳤다. 9시 28분경, 서해청 소속 헬기 511호가 현장에 도착했다. 해경이 제일 먼저 구출한 사람은 조리부 선원 김종임과 조리장 최찬열이었다.
5층 조타실에 있던 기관장 박기호는 선장 이준석의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기관부 선원들에게 전화로 탈출 지시를 내린다. “빨리 튀어 올라와!” 9시 39분, 해경 123정의 첫 구조자는 기관부 선원 5명이었다.
이후 선장 이준석과 조타실 선원들은 승객을 향한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은 채 배를 버리고 도주했다. 퇴선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세월호 선원들은 비상시 해야 하는 역할도 알지 못했다.
2. 승객을 주저앉힌 반복 안내방송
여객부 선원 강혜성은 세월호가 기울어지며 로비에 있던 많은 사람이 나뒹구는 모습을 목격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방송을 시작했다.
배는 점점 기울어져 9시 45분경에는 강혜성이 있던 3층 로비의 좌현 출입문으로도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런데도 강혜성은 오히려 “현재 위치에서 대기하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방송했다. 그 시각 선장과 조타실 선원들은 방송을 무시하고 해경 구명보트에 오르고 있었다.
3. 진도 VTS의 관제 실패
4월 16일 8시 54분, 진도VTS 관제 모니터에서 세월호의 실선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시각 진도VTS 관제실에는 관제사 8명 등 10명이 있었지만, 아무도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했다. 결국 9시 4분 목포 해경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고를 알게 됐다.
진도VTS는 두 명이 구역을 나누어 맡아 관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평상시도 한 사람에게 양쪽 구역을 모두 맡겨두고 나머지 한 사람은 쉬거나 자는 식으로 변칙 근무를 해왔다.
진도VTS가 빨리 발견해 체계적으로 세월호와 교신하고 해경에 상황을 전파했다면, 대응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었다.
4. 상황 파악 못 하는 상황실과 현장에 가지 않은 지휘관들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안 현장에 가서 지휘해야 할 지휘관은 가지 않았고, 상황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침몰하는 배의 선장과 선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영상과 사진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해경지휘부의 지시는 현장에 어김없이 전달됐고, 123정의 구조작업에 방해만 됐다.
10시 35분, 세월호 침몰 직전, 본청경비안전국장(이춘재)-서해청상황담당관(유연식) 전화
-본청: 지금 저 여객선에 우리 항공구조단이 못 내려갑니까.
-서해청: 지금은 내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본청: 아, 그러니까 진작 좀 내려서 그림이 됐어야 되는데 지금 그게 문제란 말이에요.
못 올라가면 우리가 올라가 갖고 유도한 걸 보여 줬어야 하는데.
해경이 대단한 역할을 한 것처럼 홍보할 수 있는, 그럴듯한 ‘그림’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본청: 지금 거기 승객들 거의 다 나왔어요? 배에서?
-서해청: 예, 그런데 지금 119에서 학생 하나가 안 나왔다고 했는데 지금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최후의 순간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11시 1분 뉴스에서 세월호 승객을 전원 구조했다는 오보가 나오자, 본청 상황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5. 구조에 소극적이고 방관만 했던 해경
구조함 123정은 단 9분만 세월호에 접안했다. 123정의 구조활동은 당시 현장으로 달려온 민간 어선들보다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123정은 퇴선 방송을 할 수 있었다. 세월호에 가까이 다가가 대공 마이크로 “배 밖으로 나와서 바다로 뛰어들라”라고 소리치기만 하면 됐다. 당시 세월호 4층 좌현 갑판 출입문은 열려있었다. 그 문 바로 안쪽에 단원고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해경이 선장과 선원들을 도주시킨 것에 국민적 비판이 거세지자, 김경일과 123정 대원들은 조타실에서 구한 사람들이 선원이라는 사실을 11시 10분경에야 알게 됐다고 둘러댔다.
“말도 안 됩니다. 작업복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선원인 줄 몰라요? 기름이고 뭐고 범벅이었을 텐데” (여객부 강혜성)
“조타실에서 나오는 사람이 선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하물며 배를 타는 해경들인데요.” (2등 항해사 김영호)
조타실 선원들도 해경의 구조 능력을 믿었다. 그러나, 9시 35분 123정이 도착하자 선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신정훈(1등 항해사): 이미 승선 인원을 말했으므로 당연히 큰 배가 오거나 많은 배가 올 거로 생각했습니다.
-조사관: 진술인은 작은 123정(100톤급)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신정훈: 세월호 밖으로 나와 보니 해경도 별로 없고 승객들도 별로 안 나와 있어서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9시 59분, 세월호는 기울기가 70도에 가까워졌다. 이때 3009함을 타고 현장으로 향하던 목포서장 김문홍이 처음으로 123정 김경일에게 퇴선 방송을 하라고 직접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123정은 여전히 세월호 선수와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했다. 8인승 구명보트만 세월호와 123정을 분주히 오갔다. 해경은 한 번도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다.
6. 결국 ‘누가 책임을 지느냐’의 문제였다.
-검사: 선박이 얼마큼 기울면 복원력을 상실하나요.
-배안선(3009함 항해팀장): 40~50도 넘어가면 소위 말하는 ‘전복’ 그러니까 곧 뒤집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롤링게이지(기울기측정기)라고 배마다 있는데 40도 이상은 표시도 안 되어 있습니다.
-검사: 40도 넘어갔다가 복원되는 경우 없나요.
-배안선: 없습니다. 제가 22년 동안 함정을 타면서 20도 이상 넘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배의 복원력이라고 하는 것은 기울어졌다가 곧바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한번 넘어갔을 때 바로 돌아오지 않으면 침수도 되고, 배 안에 물건들이 넘어간 쪽으로 쏠리면서 무게중심이 더욱 나빠져 결국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세월호의 경우 최초 좌현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바로 퇴선 조치를 시켰어야 하는 것입니다.
배가 40도 이상 기울어지면 복원성을 상실해 전복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선원도 알았고, 해경도 알았다. 침몰할 수밖에 없는 배에 탄 승객들이 살 방법은 오직 하나, 배에서 나오는 것밖에 없다. 해경지휘부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장 승객을 탈출시켜야 할 뻔한 상황에서 선원들은 왜 진도VTS에 물었을까?
진도VTS는 왜 직접 탈출시키라고 지시하지 않고 서해청에 물었을까?
서해청은 왜 다시 선장에게 떠넘겼을까?
감사원 조사에서 진도VTS관제사 정영민이 말했다.
“진도VTS에서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들을 퇴선 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여 퇴선한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때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서해청장 김수현도 같은 뜻으로 말했다.
“해경이 퇴선 명령으로 인한 사망 같은 2차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지 않도록 면책을 시키는 법제화가 되지 않는 한, 같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해경이 적극적으로 퇴선 명령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해경이 도착한 후 언제라도 퇴선 방송만 했다면, 훨씬 더 많은 승객을 구할 수 있었다. 바다에는 어선들과 어업지도선들이 구조하기 위해 와 있었고, 그 뒤에는 대형 상선들도 도착해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날씨도 좋았다. 수온도 낮지 않았다. 세월호 사고가 참사로 끝나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었다. 책임을 누가 지느냐가 문제였다.
○ 사회적 기록은 사회적 유산으로 남는다.
아빠는 매일 새벽 3시 일어났다. 2014년 4월 15일 수학여행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방에서 기록을 읽었다. ‘왜 구하지 않았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기록을 모았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은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아빠에게 연대의 손길을 건넸다. 함께 방대한 기록을 모으고, 동영상을 보고 또 보고, 진술서를 읽고 또 읽어 가며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세월호처럼 거대한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며,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을 해낼 역량이 없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실제로 바뀌는 것도 별로 없다는 사회적 무력감이 더 강했다.
진실은 스스로 떠오르지 않는다. 의지가 있는 이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독해하고, 분석하고, 검증해서 하나하나의 사실을 확립하고, 이를 다시 커다란 그림으로 꿰어내려고 분투할 때만 겨우 진실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다.
「“기록과 기억은 무력하지 않다. 참사의 기억은 미래로 향하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려는 우리의 고개를 붙잡아 세운다.”」
희망은 절망을 낱낱이 복기하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책을 덮고 나니 그 문장이 오래 남았다. 어느새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오래전부터 세월호에 관련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세월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저 안타까운 참사라는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은 그날의 사고가 무엇이 문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은 10년 동안 쌓인 방대한 재판기록과 동영상과 통신 기록과 진술 등을 한 권의 책에 잘 정리하고 분석했다.
어쩌면 진실은 외면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절망과 실패의 기록을 밑거름 삼아야만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진실의 조각을 엮어내려 많은 시간 애쓴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진심은 통하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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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홀씨단 소개
공익홀씨단은 광명시공익활동지원센터 소속으로 공익활동과 관련한 다양한 지역소식, 인터뷰, 공익칼럼 등을 작성하는 공익활동 기자단입니다.
시민기록자로서 사회적가치 확산을 위해 활동합니다
· 늦은 출항
2014년 4월 15일 늦은 오후, 인천 앞바다는 짙은 안개 속에 싸여있었다. 그날 하루 출항한 배는 하나도 없었다. 세월호 역시 오후 6시 30분 출항을 앞두고 발이 묶여있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은 수학여행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에 김빠진 표정으로 여행 가방에 주저앉아 있었다. 청해진해운은 안개가 걷히기를 밤 11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때보다 많은 화물을 실었고, 평소보다 수익을 더 올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밤 8시 30분 무렵,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자 인천 해경은 시정주의보를 해제했다. 세월호는 밤 9시 무렵 출항했다. 훗날 피의자 조사에서 당직 조타수 조준기는 안개 때문에 앞이 거의 안 보여 레이더에 의존해 항구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2등 항해사 김영호는 ‘내려가지 않았으면’하고 바랐다고 진술했다.
○ 세월호는 왜 침몰했는가.
1. 무리한 증·개축으로 배의 복원성 상실
청해진해운은 2003년부터 인천-제주 항로를 월‧수‧금에 단독 운항했다. 매년 흑자를 내자, 화‧목‧토에 여객선을 투입하겠다는 경쟁자가 나타났다. 위기감을 느낀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경에 일본으로 건너가 18년 사용한 세월호를 사들였다. 곧바로 실소유주 유병언 개인 사진 전시실을 만들고 여객실과 화물 적재 공간을 늘리기 위해 증·개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십억 원을 들여 배를 증축했는데도 운항 시 적재 화물은 절반 이하로 줄여야 했고, 평형수만 4.6배 늘려야만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나쁜 결과였다. 무엇보다 복원성(배가 기울어졌다가 원래의 평형상태로 돌아오는 성질) 이 나빠져 평형수(선박의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배 안에 채워 넣는 물) 를 1694.8톤이나 실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배’로 바뀌어 있었다.
화물운송 수입이 회사매출에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청해진해운으로서는 사실상 지킬 수 없는 비현실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국선급은 단순히 수치만 맞추어 세월호에 대한 ‘복원성계산서’를 승인했다. 심지어 한국선급이 승인한 선박 가운데 평형수를 채우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운항할 수 없는 배는 세월호가 유일했다.
2. 무시된 경고 신호들
2014년 1월 20일, 세월호는 제주항에서 출항에 실패했다. 예인선의 도움을 받았지만, 부두에서 30미터 정도 이동하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화물차 기사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다른 선박들은 어려움 없이 출항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류 과장 박기훈은 “화물차 기사들이 강력하게 화물 손해배상을 요구해 위험을 감수한 출항”을 했다고 적었다. 그 후 청해진해운은 자체 회의에서 들여온 지 1년도 안 된 세월호의 매각을 신속하게 추진하기로 했다.
2014년 3월 10일에는 제주항에서 화물을 실은 지게차들이 한쪽으로 집중돼 화물을 적재하다가 배가 기울어진 일이 있었다. 지게차가 있는 쪽으로 배가 기울어졌고, 이 때문에 승객용 계단이 육상에 닿아 찌그러졌다.
3. 화물은 더 싣고 평형수는 빼내고
2013년 3월 15일 취항한 세월호는 막상 운항을 시작해 보니 경제성이 없었다. 제주항에 자력으로 이‧접안(배를 안벽이나 육지에 댐)하기가 어려워 예인선 비용이 많이 들었고, 속력이 나오지 않아서 기름값이 많이 들었다. 인천-제주 항로를 한 차례 왕복할 때마다 보통 4,000만 원이 넘는 손해가 났다. 청해진해운은 2013년에만 40억 원을 웃도는 적자를 냈다.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최대한 화물을 많이 실어야만 했다.
배가 매번 운항할 때마다 운항관리자는 화물량을 확인하고 화물에 고박(화물을 고정하거나 묶는 것) 상태를 검사하고 복원성을 계산해서 출항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배 바깥에서 눈으로만 대충 만재흘수선(여객이나 화물을 승선 또는 적재하고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최대한도를 나타내는 선으로 선박의 양측에 특정한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을 확인하다 보니, 청해진해운이 화물을 더 많이 싣고 평형수를 빼내는 방식으로 운항하는 것을 잡아낼 수 없었다.
4. 고박(화물을 고정하거나 묶는 것) 불량
세월호에서 수거한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을 복구하여 배의 경사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 2층 선수 간판에 있는 컨테이너가 한쪽으로 쏠려 무너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울기가 약 20도에 도달했을 때 화물이 처음 좌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월호는 급선회 후 1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45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어졌다. 세월호의 부실한 화물 고박은 결국 배가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기울어지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5. 수밀문과 맨홀을 항상 열어놓은 기관부 선원들
2017년 3월 세월호 인양 후, 조사관들은 세월호에 지하층 기관 장비 구획의 모든 맨홀과 수밀문이 모두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수밀문과 맨홀들은 운항 중에 반드시 닫아놓아야 한다. 세월호는 7개의 기관부 수밀문과 수밀 맨홀을 항상 열어둔 채로 운항했다. 배의 안전보다는 선원들의 통행 편의가 중요했다.
기관부 선원들은 기울어진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상황에서 모든 문을 열어둔 채 기관실을 탈출했다. 열린 채 방치된 세월호는 더욱 빠르게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304명의 생사를 가른 결정적 순간 중 하나였다.
○ 왜 구하지 못하였나?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세월호는 갑자기 우회전하는 동시에 바깥쪽인 좌현으로 기울어졌다. 화물칸에 실려있던 컨테이너, 차량, 일반 화물들이 왼쪽으로 쏠렸고 그 힘으로 배는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 세월호에 열린 수밀문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101분 만에 빠르게 침몰했다.
1. 승객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주한 선원들
조리장 최찬열은 3층 승객 식당에 있다가 갑자기 배가 기울어지자, 조리부 선원들을 향해 “빠져나가라”라고 소리쳤다. 9시 28분경, 서해청 소속 헬기 511호가 현장에 도착했다. 해경이 제일 먼저 구출한 사람은 조리부 선원 김종임과 조리장 최찬열이었다.
5층 조타실에 있던 기관장 박기호는 선장 이준석의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기관부 선원들에게 전화로 탈출 지시를 내린다. “빨리 튀어 올라와!” 9시 39분, 해경 123정의 첫 구조자는 기관부 선원 5명이었다.
이후 선장 이준석과 조타실 선원들은 승객을 향한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은 채 배를 버리고 도주했다. 퇴선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세월호 선원들은 비상시 해야 하는 역할도 알지 못했다.
2. 승객을 주저앉힌 반복 안내방송
여객부 선원 강혜성은 세월호가 기울어지며 로비에 있던 많은 사람이 나뒹구는 모습을 목격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방송을 시작했다.
배는 점점 기울어져 9시 45분경에는 강혜성이 있던 3층 로비의 좌현 출입문으로도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런데도 강혜성은 오히려 “현재 위치에서 대기하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방송했다. 그 시각 선장과 조타실 선원들은 방송을 무시하고 해경 구명보트에 오르고 있었다.
3. 진도 VTS의 관제 실패
4월 16일 8시 54분, 진도VTS 관제 모니터에서 세월호의 실선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시각 진도VTS 관제실에는 관제사 8명 등 10명이 있었지만, 아무도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했다. 결국 9시 4분 목포 해경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고를 알게 됐다.
진도VTS는 두 명이 구역을 나누어 맡아 관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평상시도 한 사람에게 양쪽 구역을 모두 맡겨두고 나머지 한 사람은 쉬거나 자는 식으로 변칙 근무를 해왔다.
진도VTS가 빨리 발견해 체계적으로 세월호와 교신하고 해경에 상황을 전파했다면, 대응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었다.
4. 상황 파악 못 하는 상황실과 현장에 가지 않은 지휘관들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안 현장에 가서 지휘해야 할 지휘관은 가지 않았고, 상황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침몰하는 배의 선장과 선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영상과 사진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해경지휘부의 지시는 현장에 어김없이 전달됐고, 123정의 구조작업에 방해만 됐다.
10시 35분, 세월호 침몰 직전, 본청경비안전국장(이춘재)-서해청상황담당관(유연식) 전화
-본청: 지금 저 여객선에 우리 항공구조단이 못 내려갑니까.
-서해청: 지금은 내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본청: 아, 그러니까 진작 좀 내려서 그림이 됐어야 되는데 지금 그게 문제란 말이에요.
못 올라가면 우리가 올라가 갖고 유도한 걸 보여 줬어야 하는데.
해경이 대단한 역할을 한 것처럼 홍보할 수 있는, 그럴듯한 ‘그림’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본청: 지금 거기 승객들 거의 다 나왔어요? 배에서?
-서해청: 예, 그런데 지금 119에서 학생 하나가 안 나왔다고 했는데 지금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최후의 순간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11시 1분 뉴스에서 세월호 승객을 전원 구조했다는 오보가 나오자, 본청 상황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5. 구조에 소극적이고 방관만 했던 해경
구조함 123정은 단 9분만 세월호에 접안했다. 123정의 구조활동은 당시 현장으로 달려온 민간 어선들보다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123정은 퇴선 방송을 할 수 있었다. 세월호에 가까이 다가가 대공 마이크로 “배 밖으로 나와서 바다로 뛰어들라”라고 소리치기만 하면 됐다. 당시 세월호 4층 좌현 갑판 출입문은 열려있었다. 그 문 바로 안쪽에 단원고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해경이 선장과 선원들을 도주시킨 것에 국민적 비판이 거세지자, 김경일과 123정 대원들은 조타실에서 구한 사람들이 선원이라는 사실을 11시 10분경에야 알게 됐다고 둘러댔다.
“말도 안 됩니다. 작업복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선원인 줄 몰라요? 기름이고 뭐고 범벅이었을 텐데” (여객부 강혜성)
“조타실에서 나오는 사람이 선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하물며 배를 타는 해경들인데요.” (2등 항해사 김영호)
조타실 선원들도 해경의 구조 능력을 믿었다. 그러나, 9시 35분 123정이 도착하자 선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신정훈(1등 항해사): 이미 승선 인원을 말했으므로 당연히 큰 배가 오거나 많은 배가 올 거로 생각했습니다.
-조사관: 진술인은 작은 123정(100톤급)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신정훈: 세월호 밖으로 나와 보니 해경도 별로 없고 승객들도 별로 안 나와 있어서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9시 59분, 세월호는 기울기가 70도에 가까워졌다. 이때 3009함을 타고 현장으로 향하던 목포서장 김문홍이 처음으로 123정 김경일에게 퇴선 방송을 하라고 직접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123정은 여전히 세월호 선수와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했다. 8인승 구명보트만 세월호와 123정을 분주히 오갔다. 해경은 한 번도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다.
6. 결국 ‘누가 책임을 지느냐’의 문제였다.
-검사: 선박이 얼마큼 기울면 복원력을 상실하나요.
-배안선(3009함 항해팀장): 40~50도 넘어가면 소위 말하는 ‘전복’ 그러니까 곧 뒤집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롤링게이지(기울기측정기)라고 배마다 있는데 40도 이상은 표시도 안 되어 있습니다.
-검사: 40도 넘어갔다가 복원되는 경우 없나요.
-배안선: 없습니다. 제가 22년 동안 함정을 타면서 20도 이상 넘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배의 복원력이라고 하는 것은 기울어졌다가 곧바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한번 넘어갔을 때 바로 돌아오지 않으면 침수도 되고, 배 안에 물건들이 넘어간 쪽으로 쏠리면서 무게중심이 더욱 나빠져 결국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세월호의 경우 최초 좌현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바로 퇴선 조치를 시켰어야 하는 것입니다.
배가 40도 이상 기울어지면 복원성을 상실해 전복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선원도 알았고, 해경도 알았다. 침몰할 수밖에 없는 배에 탄 승객들이 살 방법은 오직 하나, 배에서 나오는 것밖에 없다. 해경지휘부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장 승객을 탈출시켜야 할 뻔한 상황에서 선원들은 왜 진도VTS에 물었을까?
진도VTS는 왜 직접 탈출시키라고 지시하지 않고 서해청에 물었을까?
서해청은 왜 다시 선장에게 떠넘겼을까?
감사원 조사에서 진도VTS관제사 정영민이 말했다.
“진도VTS에서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들을 퇴선 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여 퇴선한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때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서해청장 김수현도 같은 뜻으로 말했다.
“해경이 퇴선 명령으로 인한 사망 같은 2차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지 않도록 면책을 시키는 법제화가 되지 않는 한, 같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해경이 적극적으로 퇴선 명령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해경이 도착한 후 언제라도 퇴선 방송만 했다면, 훨씬 더 많은 승객을 구할 수 있었다. 바다에는 어선들과 어업지도선들이 구조하기 위해 와 있었고, 그 뒤에는 대형 상선들도 도착해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날씨도 좋았다. 수온도 낮지 않았다. 세월호 사고가 참사로 끝나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었다. 책임을 누가 지느냐가 문제였다.
○ 사회적 기록은 사회적 유산으로 남는다.
아빠는 매일 새벽 3시 일어났다. 2014년 4월 15일 수학여행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방에서 기록을 읽었다. ‘왜 구하지 않았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기록을 모았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은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아빠에게 연대의 손길을 건넸다. 함께 방대한 기록을 모으고, 동영상을 보고 또 보고, 진술서를 읽고 또 읽어 가며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세월호처럼 거대한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며,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을 해낼 역량이 없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실제로 바뀌는 것도 별로 없다는 사회적 무력감이 더 강했다.
진실은 스스로 떠오르지 않는다. 의지가 있는 이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독해하고, 분석하고, 검증해서 하나하나의 사실을 확립하고, 이를 다시 커다란 그림으로 꿰어내려고 분투할 때만 겨우 진실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다.
「“기록과 기억은 무력하지 않다. 참사의 기억은 미래로 향하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려는 우리의 고개를 붙잡아 세운다.”」
희망은 절망을 낱낱이 복기하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책을 덮고 나니 그 문장이 오래 남았다. 어느새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오래전부터 세월호에 관련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세월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저 안타까운 참사라는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은 그날의 사고가 무엇이 문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은 10년 동안 쌓인 방대한 재판기록과 동영상과 통신 기록과 진술 등을 한 권의 책에 잘 정리하고 분석했다.
어쩌면 진실은 외면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절망과 실패의 기록을 밑거름 삼아야만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진실의 조각을 엮어내려 많은 시간 애쓴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진심은 통하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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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홀씨단 소개
공익홀씨단은 광명시공익활동지원센터 소속으로 공익활동과 관련한 다양한 지역소식, 인터뷰, 공익칼럼 등을 작성하는 공익활동 기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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